사는 이야기

용서..

휼리 2006. 4. 2. 03:41

 ...그 주말을 다시 회상하노라니 나치 학정을 고스란히 겪은 독일인 헬무트 틸리케의 말이 떠오른다.

[용서라는 일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상대가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빌기만 한다면 다 용서하고 싸움을 끝내지." 우리는 용서를 상호 교환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곧 양쪽 모두 "저 쪽에서 먼저 시작해야 돼"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상대방이 눈짓으로 무슨 신호라도 보내지 않는지 혹은 상대의 편지에 미안함을 표하는 작은 표시라도 없는지 매처럼 잔뜩 눈만 굴린다. 나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용서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옳은 것이다.]

 틸리케는 하나님이 자기 죄를 용서하사 다시 기회를 주신 사실 -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의 교훈- 을 깨닫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비은혜의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곧 주도권을 쥐고 행한다는 말이다. 틸리케는 복수와 공평의 본성을 거스려 상대가 먼저 나서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기 편에서 먼저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여태 자기가 설교는 했지만 실천은 못했던 그 복음의 한 복판에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 용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정의한 헨리 나우엔은 그 (용서의)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원한이 남아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칭찬 - 너그러이 용서한 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는 쾌감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마음, 이기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일상 생활에서 연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용서다. 그러려면 용서가 현명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하며 실효성이 없다는 나의 모든 주장을 이겨내야 한다. 감사와 칭찬에 대한 모든 욕구를 넘어서야 한다. 끝으로 아프고 억울한 가슴의 상처와 나와 용서의 대상 사이에 약간의 조건을 둠으로써 계속 통제권을 쥐고 싶은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한다.]

-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中 에서

   

예전엔 이런 얘기 들으믄 도덕 교과서 글귀처럼 그저 좋은 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하도 겪은 게 많다 보니 잘 하면 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조건 없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또는 아무런 댓가 없이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 그게 연예인 일지라도 -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면 조건 없이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다.

필립 얀시는 저 책에서 용서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는 자 모두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라고도 썼다.
용서해 보자. 자유를 되찾자.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은혜에서 공급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