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에 대한 오해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7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1~7, 한글공동번역성경)
이제껏 나는 '자유의지' 라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라고 정의해 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알기 전의 상태에서의 '내 마음'이라는 것은
- 세상의 풍조를 쫓는 것이며
-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사는 것이며
-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사는' 것처럼 보인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다시 말해 도덕이나 종교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평소에 접할 수 있는 성경 번역본 대신에 굳이 이렇게 '악령' 이라거나 '두목' 같이 강한 단어들로 번역된 성경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내가 생각해왔던 자유의지의 상태가 사실은 결박이며 구속이었다는 것이
이런 단어들을 통해서 보다 직설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상태에는 모두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지만 특별히 죄에는 몇 십 배가 강한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한 악령이 들었다가 치유된 자에게 다시 일곱 악령이 들어가는 예화는 죄에 대한 관성의 법칙을 너무나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구속 받았던 자는 그 구속을 그리워한다.
적어도 일정의 기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허전함을 느끼게 되고
자기에게 부여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한다.
심지어는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구속의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보다 낫더라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내가 거룩한 척 하며
하나님을 따르기로 했으니 이런 건 포기해야지 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내심 아쉬워하며 아까워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구속이고 족쇄였다는 것을
내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길을 가기로 한 내 결정에
무슨 숭고한 의미가 깃들여있는 양 스스로에게 거짓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길을 선택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