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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스크랩] 인내의 영성 - 정형수

 

정형수 
· 침례신학대학교(B.A)
· 침례신학대학대학원(M.A)
· 육군군목
· 현)광주 아시아교회 담임목사
· 현)기독타임스, 전북기독신문 칼럼니스트


인내의 영성
Asimov는 "재주가 있으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으나 끈덕져야만 온전한 성공을 이룰 수 있다"라 하였고, Prescott는 "능력 대 인내의 경쟁에서는 인내에 걸라"라 했으며, St. Catherine은 "많은 인내 없이는 큰일을 결코 해 낼 수 없다"고 했으며, Anon은 "참으라, 꽃을 따면 열매는 없다" "참기만 하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또 Persius는 "견디는 이는 정복 한다"고 했다. 모두 인생의 성공의 저변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함을 강조한 말이며,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승리하는 삶의 근본적인 비결을 배운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 세상에 환란을 피해갈 수 있는 인생은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에게 각양각색의 환란이 있다. 그리고 고뇌하고 고통하며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그 환란을 통과해 간다. 불가항력적인 인생의 환란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인내하는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인내만 하는 것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 그것은 필요에 의한 굴복, 희망에 대한 포기, 의지에 대한 체념일 뿐이다. 동일한 형태의 인내라 할지라도 이러한 부정적인 인내는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능력도 공급해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더 적극적인 성격을 띤다. 단순한 체념이나 포기, 굴복을 뛰어넘어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거운 것으로 수용한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인내의 영성"은 한결같이 "가슴 설레는 황홀한 인내, 감격스런 인내, 기쁨을 누리는 인내"였다. 이것은 자신에게 닥친 일을 기쁨으로 견뎌내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승리의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며, 그리스도인다운 품위 있고 아름다운 인내의 영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내의 영성은 언제나 '환란-인내-연단-소망"(롬5:3-4)의 공식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을 아름답고 순결하며 즐겁고 기쁜, 그리고 가슴 벅찬 감격의 영적 흥분이 있는 인내의 영성을 세워주는 세 가지 원천이 있다. 즉 신앙, 사랑, 비전이다.

   

1. 신앙

"신앙"이란 믿음을 말한다. "신앙"이란 "어떤 것을 기다린다."(히: Yachal)는 뜻이다(사40:31). 그것은 심한 압박 하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칼은 "오래 참고 기다린다'란 의미다.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생생한 믿음은 인내를 만들어 준다. 모든 환란을 방어해 주는"믿음의 방패"(엡6:16)이다. 우리가 인생의 화살과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려면 우리 속에 빛나는 믿음을 품고 있어야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의 성품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 힘든 때를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다.

   

욥은 극심한 시련을 통과한 사람이다. 그는 연달아 많은 재산과 모든 자녀와 건강, 아내까지 상실하였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갈등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비록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할지라도 나는 주님께'소망'(Yachal)을 두리라"(욥13:15)고 고백한다. 여기서 야칼은 극심한 압박하에서 인내를 가지고 계속 소망을 갖는다는 뜻이다. 주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욥에게 역경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안정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욥은 철저하게 주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약속)을 믿었다(욥19:25-27). 욥은 이 믿음이 있었기에 소망 중에 인내할 수 있었다. 고난 중에 있던 다윗도 믿음을 가지고 찬양하는 인내의 영성을 간증한다(시71:14). 다윗은 늙어가는 것과 적에게 포위당할 일을 예상하고 불안과 걱정에서 한 시도 떠날 줄 몰랐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 있는 믿음으로 안정된 마음과 인내를 갖게 된다. 예레미야의 애가(哀歌)는 민족의 참화에 대한 애절한 비탄을 표현한다. 아름다운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은 잔인무도한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황폐되었고, 연약한 민중들은 짐승처럼 도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쇠사슬에 묶여 노예로 끌려갔다. 그러나 비참하고 참담한 민족의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오히려 인내하며 소망한다(애3:21-24). 그가 이렇게 어두운 시간에도 인내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긍휼을 전적으로 신뢰한 믿음 때문이었다. 야칼은 모든 환란과 비참함 속에서도 주님의 성품과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주님께 집중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Longfellow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갈아도 극히 부드럽게 간다.

그가 비록 오래 참으시나 모든 것을 분명히 하신다."

   

만약 우리에게 닥쳐온 암울한 시간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도 없다면, 우리에게 사고나 우연 밖에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체념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긍휼과 자비, 사랑의 약속들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린 체념이나 포기가 아닌 새로운 영성적인 감정과 확신 그리고 즐거움으로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은 어떤 상황도 소망 중에 기뻐하며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이런 사람은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6)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 믿음은 혼란 가운데서도 분별할 수 있는, 어두운 가운데서도 빛을 볼 수 있는, 황폐함 속에서도 풍요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비참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기쁨으로 인내한다. 믿음은 인내의 능력이다.

   

2. 사랑

사랑하는 마음은 이미 인내할 능력을 소유한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보라. 인내는 결코 우울하지 않는 사랑의 본성이다. 사랑의 인내 속에는 노래가 있고, 열매를 위한 꽃망울이 있다. 수천 번의 우리의 어리석음과 수치, 범죄들을 용납하시며 견디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그분의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하신 것이다. 사랑은 인내의 원천이다. 사랑 속에는 죽음을 넘어선 인내가 존재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에서 오는 인내의 극치다. 최악의 상황을 최 절정의 사랑으로 최선의 인내를 이루셨다. 그 인내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랑은 지금도 매 순간 계속되고 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인내는 나의 모든 상황에 대해 인내해 주신다.

   

우리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아가페가 있다면 우리도 주님의 인내를 배울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특성 15 가지를 언급할 때, "사랑은 오래 참고"(4절), "모든 것을 참으며"(7절),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절하), 등을 통해 "인내"의 특성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 4절의 "오래 참고"(헬: makrothumia)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악행, 손해, 억울함을 견뎌내는 특징을 말한다. 즉 사람들에게 그릇된 대우를 받고 잘 못된 취급을 받아 상처를 받았을 때 복수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참아내는 성품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통의 현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죄악과 대결하면서도 마침내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창조적 성품이다. 뿐만 아니라 7절에서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숫한 약점들이나 허물, 죄악들을 덮어주는 "참음"(헬: Stego)을 강조한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내어 나팔을 불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의 약함을 덮어주며 참아준다. 여기서 "덮어준다"는 의미는 "덮어주되 상대의 짐을 대신 짊어져주고 상대의 허물을 덮어준다"는 뜻이다. 또한 남의 허물과 불완전에 대해 언제나 참기를 힘쓰라, 당신도 허물과 불완전이 허다하기 때문이다(Kempis). 상대의 허물을 참아라, 아마도 상대는 당신의 허물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사랑은 온갖 환경의 중압감을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준다. 또 7절 하반절의 "견디느니라"는 환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고통을 견딘다는 의미다. 사랑은 비록 환경적으로 모든 희망이 끊어질지라도 여전히 견딜힘을 준다(히11:35-38).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환란과 고통의 환경에서도 인내하면서 승리할 수 있는 자원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부어지는 낙관적인 인내의 영성이다. 사람들은 좋지 못한 인간관계와 고통스런 환경으로 인해 염세주의적 우울증에 빠져들 수 있으나, 성령을 통해 부어진 사랑으로 말미암아 낙관적인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내의 영성을 누릴 수 있다.

   

3. 비전

Fisher는 말했다. 꿈은 우리에게 평생을 두고 밤마다 조용하고 안전하게 미치게 한다고. 또 실존주의 철학자 Kierkegaard는 "현재에 몹시 불쾌한 것도 꿈에는 몹시 유쾌한 것이 된다."고 했으며, Hughes는 "꿈을 고집하고 버리지 말라, 꿈이 죽으면 삶은 날개 부러진 새같이 날지 못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꿈은 살 가치와 의미를 준다. 미래를 준다. 그러기에 꿈은 인생의 환란 시기에 기쁜 인내를 이루게 한다. 비전의 무지개를 본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모든 사람, 환경, 상황에 대한 먹구름을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왜 인내하였는가? 그것은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히11:27). 자신의 꿈과 씨름하는 모든 발명가, 탐험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인내한다. 주님은 원수들과 최악의 환경과 상황에서도 구원에 대한 비전을 인하여 참으셨다(히12:2). 그분의 인내는 평안과 기쁨으로 빛나는 인내였다. 겟세마네에서의 흔들리지 않는 인내, 갈보리 죽음을 즐거움으로 맞이하신 인내, 그 고통의 배후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하시며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흐려지지 않는 비전이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비전을 두고 안에서 밖으로 일해 나오신다(빌2:13). 인간적인 야망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소원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살 때만이 비전이 주는 기쁨의 인내를 이룰 수가 있다. 성령은 비전을 성취시키는 원동력이다(롬15:13). 이 비전을 간직한 사람만이 기쁘고 즐거우며 감격스럽고 황홀하기까지 한 인내를 이룰 수 있다. 비전이 있는 인내는 결코 쓰지 않다.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고 고통스러울 때 우린 주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다. 우리의 길이 아직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린 이미 주님이 가슴에 심어주신 비전을 따라 기뻐하며 인내할 수 있다. 비전은 인내를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 행복한 집을 인내의 벽돌로 짓는다.

[출처: GMNnews]

   

내가 부당한 야근과 주말 근무에 대해

'이 정도 해주면 되는 거 아냐?' 라거나

'그건 당신들 사정이지, 왜 내가 같이 피해를 봐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을 때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사랑' 임을 알게 되었다.

   

그럼 내 안의 다른 나가 내게 묻는다.

그런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느냐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 연이은 반박이 되어 마음에 메아리 친다.

   

쳇바퀴 같은 피곤한 일상에서

한 칼럼니스트가 설파하는 사랑과 비전에 대한 각성이

내 삶의 형태를 얼마나 변형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적어도 내 스스로의 결핍을 깨달았다는 것이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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