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사리 함께 사용하는 두 단어이지만..
사실 내 안에는 사랑과 정의가 대치되는 의미로 존재하지 않았나 싶다.
나름대로
조직의 리더 역할을 맡아보기도 했었고
인생의 후배들을 다독거리는 자리에도 있어보았고
어린 아이들을 이끄는 교사의 자리에도 있어보았지만
사랑과 정의를 양립하기가 말 만큼 쉽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지적해야 마땅한지,
용납해야 마땅한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과
권면하라는 말씀 중
어느 것을 먼저 좇아야 하는지조차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굳이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정의를 한 묶음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남들에게는 새삼스러울 수도 있겠다.
솔직히 나 자신을 돌아보자면
나는 언제나 사랑보다 정의가 앞서는 사람이었다.
가슴 밑바닥 어디에선가
내가 그의 잘못을 말해 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계속해서 나에게 피해를 줄 지도 모른다는
자조적인 두려움이 나를 묶고 있었던 것 같다.
'지적'은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명제 따위는
편할 때 꺼내 쓰는 액세서리쯤으로 치부했었나 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의 자복을 요청하시지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완벽한 용서를 주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인내는 삼세번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는 정의와 사랑이 하나다.
정의 없는 사랑은
결국 범죄자를 키울 뿐이라고 어느 동화에서도 교훈하지 않던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 없는 정의만 내세웠다면
세상엔 온통 구원 받지 못한 자들만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안달하는
그 '권면'의 이유는
오로지 '사랑' 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제 막 고통과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까?
당신이 몇 주 동안 보트 위에서 표류하다 방금 구출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또는 9개월 동안 말기 암으로 고통 받다가
의사에게서 "신기할 따름입니다. 암 세포가 모두 없어졌어요" 라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안도와 기쁨을 누리는 몇 시간 동안 당신이 얼마나 인내하고, 친절하고, 관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이제 이러한 상상에 덧붙여, 당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과 내가
고통과 박해, 질병과 죽음, 그리고 지옥 외에는 그 무엇도 얻을 자격이 없었음을 깊이 묵상해 보라.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우리 죄의 삯은 영원한 죽음이었다.
우리의 본래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 운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안도감과 행복감에 더해
그럴 자격이 없기에 당혹스러운 놀라움과 상한 마음으로 기뻐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자비가 주어진 것이다.
당신의 상황을 깨달으라.
당신이 처한 비참함과 당신에게 임한 긍휼을.
당신이 빠져나 온 그 공포,
당신을 살게 한 그 긍휼,
그리고 그리스도가 치러야 했던 대가를 기억하라.
이 모든 사실 안에서 겸손하고 감사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천만 배 이상으로 선대하셨다.
그것을 가슴 깊이 느끼라.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살라.
- 존 파이퍼의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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