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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That's how love is..

어떤 친구가 그랬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선한 일만 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냐고..
하나님은 왜 애초에 에덴에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의 존재를 허락하셨냐고..
예정설이니 자유의지니 벌써부터 어려운 말들이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대답은 오로지 하나, 바로 '사랑'이다.

   

필립얀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 "the miracle of restraint" 라는 까라마조프의 표현을 인용해 그 사랑을 설명하고 있고,
박영선 목사님은 이를 '하나님의 자존심'이라고 표현하셨다.

   

세상에 나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 받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선택 받기를 바라는 연인의 마음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고 싶지 않으신 거다.
어떤 의미로든 강요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닐 것이므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축복과 생명의 길을 가도록 간섭해 주시지만
그 간섭의 한계는 언제나 우리의 선택을 침해하지 않는 곳까지일 뿐이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세상에 공포하셨지만
그 사랑에 반응하거나, 안하거나는 오로지 우리의 선택으로 남겨두셨다.

   

얀시는 그의 책에서 아마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예수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까지 썼다.

   

무한의 능력과 절대의 권력을 가지신 분께서 우리의 인격을 그만큼이나 존중해 주시기로 하셨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 되어
현대 세상에서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비웃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다.

   

능력이나 권력의 면에서 전혀 내세울게 없는 나는
종종 '책임' 이라던가, '동정' 또는 '도덕'을 사용해서 상대방의 사랑을 강요한다.
내가 준 것만큼 돌려받으려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나름의 수단을 발휘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산다.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연인에게 하나님처럼 모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가능성이라는 것에, 내 마음까지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장사 속 같은 건 벗어두고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도
포함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다림으로, 겸손함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해 가야 할 일이다.